철의 비의 (1) 소설




옛날 신라에서는 전쟁에 종군한 청년이 마을의 아름답고 품성 바른 처녀와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거울을 둘로 쪼개놓고 길을 떠났다고 한다.
그들의 사랑은 이뤄지지 않고 거울만이 돌아왔지만 연인들이 사랑을 잊지 않으려는 몸짓은 현대의 시밀러 룩으로 이어진 듯하다.
컨버스와 나이키, 리복의 커플 운동화, 깔맞춤한 커플 후드티, 톤온톤 컬러 셔츠와 원피스의 믹스매칭까지 연인들이 하나임을 뽐내는 방식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그리고 촛불로 하트표 만들기, 둘만의 포토북 만들기, 소풍갈 때 도시락 만들기처럼 사소하지만 오래 기억되는 이벤트도 많다.
그런데.... 나는 어째서 여자친구를 피해 언덕길을 달리고 있는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한참을 뛰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이제는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갈데도 없어졌다. 비를 피하고자 마을의 사당으로 들어갔다.
사당의 중심에는 기이한 얼굴모양의 미륵석이 있었고 뜰 안편에는 꾸벅꾸벅 조는 닭 한 마리가 있었다.
순식간에 현대에서 시대를 거슬러 고대로 이동한 듯한 느낌이었다.
사방은 너무 고요해서 발소리조차 숨죽여야 할 것 같았지만 이대로 서 있기만 하기도 뻘줌한 기분이라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저기 아무도 없으신가요?"
좁은 공간이었지만 사방이 벽으로 둘러싼 탓인지 내 목소리는 메아리되어 돌아왔다.
"실례를 무릅쓰고 들어왔습니다만..."
거대한 석실 안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은 외부와 분리된 세계로 통신전파조차 잡히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실제로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럽게 벨을 울리던 휴대폰이 잠잠하다.
끼이익—
무거운 분위기를 깨기라도 하듯 경박스런 소리가 들렸다. 무인도에서 바다 너머에서 다가오는 빛을 본 사람처럼 마음이 설렜다. 잠시였지만 완전한 고독을 경험한 탓일 것이다.
"여긴 자네 같은 사람이 올 곳이 아닐세. 썩 물러나게나."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당지기쯤 되려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청했다.
"그러나 어르신, 보시다시피 밖은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잠시 몸만 쉬었다 갈 수 없겠습니까?"
그러자 노인은 끌끌 혀를 찼다.
"굳이 험한 길로 가겠다 하는구만.. 이것도 하늘의 뜻이라면 말릴 수야 없겠지. 지금도 비가 내리는가?"
대뜸 던진 질문에 황망히 주변을 바라보니 날은 어느덧 화창해 있었다. 그리고 사당의 주위는— 어느새 울창한 삼림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그.. 그만 돌아가보겠습니다."
당황스런 마음에 황급히 인사하고 사당 문 밖을 나서자 그곳은 이미 내가 익히 알던 세계가 아니었다.
"꿈이 아닐세."
"...예?"
내 마음을 읽은 듯했다. 누구라도 이런 상황은 꿈이라 의심할 만하다. 그것도 아니라면 모르는 새에 몽유병이라도 걸린 걸지도 모르겠다.
"이곳은 공간을 이동하는 차원의 통로, 세계에 간혹 열리는 시공의 문이지. 문에 발을 들이고서 바로 나간다면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만, 잠시라도 머무르는 순간 차원은 뒤바뀐다. 그게 이 통로의 법칙일세."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판타지 소설 읽기가 취미 중 하나지만 현실에서 직접 겪고 싶진 않았다구!
"저는 믿을 수 없습니다. 아마 제가 길을 착각했나봐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더 이상 노인의 말을 듣다간 말장난 같은 소리가 현실이 될 것 같아 황급히 발걸음을 나섰다.
그러나 불안이란 예감은 애벌레처럼 스멀스멀 머릿속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라는 언젠가의 노래도 있지 않은가?
아닌 게 아니라 아까부터 스마트폰의 통화품질 표시가 0을 달성하고 있었다. 빽빽한 삼림 속이라 그럴 수 있다 치지만, 불길한 노인의 말대로 산을 내려가서도 통화가 터지지 않으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내 여자친구 민영이와 나만 바라보는 강아지 똘이는 어떡해야 하지?
대기업에 취직도 하고 한창 결혼준비까지 하고 있었는데 이런 오지에 고립되면 그동안 바친 노력은! 창창한 내 앞길은!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앞이 탁 트인 언덕으로 내려오자 웬 마을이 보였다. TV에서나 보던 전주 한옥마을 같은 생김새에다 솥에다 밥 짓는 연기까지. 이거 완전 일이 꼬였는데? 몽유병이 그리도 심했나?
휴대폰의 통화품질은 여전히 0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슬슬 배가 고파져 마을로 내려갔다. 우선 밥이라도 얻어먹어야 될 것 같다.

두구닥 두구닥 두구닥
어디선가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길 저편에서 태풍이 몰아치는 듯한 흙먼지가 밀려왔다.
"게 섰거라. 수상한 자로다."
긴 수염에다 위엄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가 말했다. 주변의 갑옷을 입은 사람들은 심히 황송하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왠지 잘못 걸린 것 같은 느낌이다.
그는 의심쩍은 눈길로 내 옷가지며 신발, 머리 모양을 훑어보더니 우렁차게 호령했다.
"인근에서 못 보던 복장이니 당장 옥에 가두어라! 이자의 정체를 심문해야겠다!"
아뿔싸.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속으론 무진장 떨렸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말했다.
"장난치지 마세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알만큼 아실 분이."
그러자 사내의 표정은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무엇들 하느냐!! 얼른 잡아들이지 않고!!"
"예~~"
굽신거리는 가신들이 달려와 손발을 겁박하고 입에 재갈을 채웠다. 원망 가득한 표정으로 사내를 쳐다봤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역시 여자한테 잘해야 복을 받는다는 민영이의 말이 맞았나.. 민영아~ 보고 싶다~

군대에서도 생각나지 않던 민영이가 사무치게 그리운 날이었다.


1 2 3 4 5 6 7 8 9 10 다음